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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한강 <흰>

작가 한강의 이름은 익히 들어왔었다. 하지만 직접 그녀의 책을 읽어본 것은 부커상 인터내셔널 수상 소식을 듣고 난 이후다. 수상과 함께 국내 독자들이 적극적으로 <채식주의자>를 찾은 것처럼,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요즘만큼 소설을 읽던 시절이 아니어서 그랬던 것인지, 그냥 내 취향이 아니었던지 <채식주의자>는 내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마게이트의 터너 컨템퍼러리 갤러리에서 영국 작가 Katie Paterson의 전시를 보게 되었다. 이 작가의 노르웨이 미래 도서관 프로젝트에 한강 작가의 작품이 소장되었다는 걸 알았다. 백 년 후에 꺼내봐도 좋을 작품이라고 한강의 글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Katie Paterson의 전시가 흥미롭고 훌륭했기에 한강 작가가 그녀와 함께 한다는 소식에 약간 들뜬 마음이 들었다.
얼마 전 영국의 교보문고라 할 수 있는 워터스톤즈 피카딜리 지점에 갔다. 매대에 한강 작가의 소설 <흰>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몇일 후 <책읽아웃-오은의 옹기종기>에 한강 작가가 나와 얘기해서 그녀에 대해 좀 더 알게 되었다. 소복소복 내리는 흰 눈 같은 그녀의 목소리와 말투가 듣기 좋았다. 작가님에게 반했다. 그리고 신작 <작별하지 않는다>라는 책은 제목부터가 내게 강렬하게 다가왔다. 이후 한강 작가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서 그녀의 책을 더 찾아보았다. 어제부터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와 <흰>을 읽기 시작했다. 시집의 첫 시, <어느 늦은 저녁 나는>은 나를 사르르 녹게 만들었다. 작가의 통찰에 아... 하는 감탄이 나왔다. 그런데 <흰>의 책장을 열고 첫 장에서 나는 눈물을 쏟아냈다. 나를 흔들었던 구절은 다음과 같다.

해오던 일을 모두 멈추고 통증을 견디는 동안, 한 방울씩 떨어져내리는 시간은 면도날을 뭉쳐 만든 구슬들 같다. 손끝이 스치면 피가 흐를 것 같다. 숨을 들이쉬며 한순간씩 더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이 또렷하게 느껴진다. 일상으로 돌아온 뒤까지도 그 감각은 여전히 그 자리에 숨죽여 서서 나를 기다린다.
그렇게 날카로운 시간의 모서리-시시각각 갱신되는 투명한 벼랑의 가장자리에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책을 읽으며 이렇게 눈물을 쏟아낸 경험은 처음이다. 내 어깨에 살며시 내려앉은 초록의 나뭇잎처럼 다가오는 구절이었다. '그래 모두 다 마찬가지로 견뎌내고 있어, 너만 힘들지 않아, 인생이 다 그런 거야' 라며 내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게 위로가 되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라는 부분이 희망적이면서 든든한 마음을 갖게 했다. 그것이 비록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떤 식으로든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하더라도.

한강의 흰, 런던 워터스톤즈


한강은 언어의 다른 감각, 다른 차원을 경험하게 해주는 예술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모를 경외심을 갖게 된다. 영국에 사는 한국인 지인이 곧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는데 <작별하지 않는다>를 빌려주시겠다고 했다. 제목부터 아련한 이 책, 너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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